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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공성

충성도와 가치, 공공성 연구

검은콩콩 2020. 10. 8. 13:26

2년 전에 들었던 교수님 수업을 똑같이 이번 학기에 다시 듣고 있다. 2년 전 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에 밀착되어 있었다. 당장 언제까지 끝내야 하는 프로젝트들이 있었고, 매일매일 윗사람들을 만나서 보고하고 어필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때 나는 그게 내 삶의 의미였다. 내 목표는 도서관이 더 많은 예산을 받아서 더 많은 인력으로 더 많은 서비스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를 만나는 작가들, 번역가들, 한국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 출판사들 모두가 각자의 활동을 즐겁고 재밌게 이어나갔으면 했다. 그러려고 나는 이 공부를 해왔고, 지금 여기서 이렇게 매일매일 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힘들 때면 내 그런 생각을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셨고, 그렇게 힘겹지만 한 발자국씩 떼어 나갔던 것 같다. 2018 평창올림픽 당시 나는 크게 소진되었고, 보람은 컸지만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사건과 겹쳐 슬럼프가 아주 크게 찾아왔다. 많이 힘들어하던 내게,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어른이었던 내 상사는 대학원에 가는 걸 권했다. 사실 그때 대학원에 대한 기대가 별로 크지는 않았다. 그저 학교 정문을 다시 들어서는 순간 10여년 전 내가 가졌던 새로움에 대한 설렘이 생각났고, 그 자유로운 공기가 좋았을 뿐이었다. 직장인이니까 저녁 수업을 들어야 해서 수강하게 된 교수님의 마케팅 수업에서 나는 엄청난 새로움을 마주하게 됐다. 오, 이런 게 학문인건가? 내 몸 속에 피가 다시 돌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여전히 현장에 발을 딛고 있던 나는 현실에, 기존의 틀에, 밀착되어 있었고, 그래서 수업 내내 나의 머릿 속은 풀리지 않는 수많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1학기가 지나고, 2학기에 들어서면서 결국 회사를 그만 두기로 했다. 이후에 나는 현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계속 했던 것 같다. 워낙 현장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현장 위주로만 생각을 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어떤 연구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교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연구가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써간 결과물에 대한 교수님의 피드백은 늘 본질적이었고, 그래서 나는 늘 충격에 휩쌓였다.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단 번에 알게 된 나는 직시하게 된 바로 "그것"을 바꾸려고 했다. 하루종일 "그것"이 생각이 났다. 버려야 하는, 바껴야 하는 "그것"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았다. 내 뇌를 통째로 다시 뭉쳐서 새롭게 완전히 다른 모양을 만드는 기분이었다. "자기파멸적"이라는 용어가 계속 생각났고,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러고 나면 무엇을 봐도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요새도 그러하지만, 괴로움 보다는 조급함이 앞서는 게 더 힘들긴 하다. 회사를 그만둔지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내 머릿 속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제는 현장과 연구 사이가 조금씩 벌어지면서 틈이 생겨난 것 같다. 딱 밀착되어 있던 현장과 떨어지게 되면서, 새로운 것들이 들어올 자리가, 빈 공간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이제 내 삶의 의미들을 찾기가 수월해졌다.

 

어제 수업은 "충성도"에 대한 것이었다. 극단적인 충성도는 왜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충성도는 어떻게 유지되는지, 충성도와 행복의 관계는 무엇인지 등등이 논의되었다.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고, "합리적이지 않은 판단"을 동반하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교수님은 자기 것을 버려야 하는 "희생"이 큰 상황에서도 충성도 높은 행위들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충성도 높은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회사 상품을 의인화해서 "이 아이는 어떤 아이이고" 라는 식으로 브랜딩을 하는 것도 상품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모습이라고 보셨다. 맞는 말이다. 나도 물건이나 사람을 나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물건은 소유하고 나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내 평생을 함께 갈 반려자 같은 기분마저 든다. 그런데 나는 그런 동일시가 자본주의적인 물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스타그램에서 접한 지구 반대편 어떤 곳에서 화려하게 꾸며진 삶을 포착한 장면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유투브 채널에 나와서 본인만의 뷰티 노하우를 전하는 스타일리시하고 감각적이며 트렌디한 유투버를 보면서 댓글에 "언니, 그 귀걸이는 어디 꺼에요? 그 스웨터는 어디서 산 거예요?"라고 남기는 것. 그런 동일시에 대한 욕구가 상품의 소비를 촉진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게 만든다.

 

공공의 영역에서 충성도는 좀 다른 맥락인 것 같다. 기업에서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소비를 이끌어내는 마케팅적 접근 보다는, 우리의 삶이 건강해지고 다같이 행복해지기 위한 가치추구적 접근이 더 부합하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한대의 충성도를 보인다. 나는 어떤 사람의 독보적인 장점을 발견하면 그 부분을 인정하고 좋아한다. 그런 애정으로 그 사람이 계속 그 활동을 해나가길 바란다. 그럼으로써 내가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그 사람의 가치 추구 활동을 응원하고 지지하려고 한다. 내가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하더라도 정말 괜찮다. 나 또한 그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활동이 곧 나의 활동이다. 오히려 나의 시간과 돈, 노력으로 그 사람의 활동이 더 잘 되면 그야말로 행복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나 상품", 즉 물성을 가진 실체와 나를 동일시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나 기관이 추구하는 "가치"를 동의하고 지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비슷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와 "결이 맞는 사람들"이고, 나는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도록 좋은 영향력을 미치길 바란다. 그리고 그게 결국 공공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지지 못한 그 장점을 그 사람에게서 발견하면, 그 사람을 존중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은 유독 그 장점이 부각되어 눈에 잘 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 장점을 진심을 다해 칭찬함으로써 그 사람이 자신이 가진 가치를 인식하고 그 순간만큼 진실로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 충성심은 모든 사람에게 생기지는 않는다. 그 장점이 지닌 가치가 나와 결이 맞을 때만이 내 "찐" 충성심이 생겨난다. 그래서 나의 찐 충성심을 가진 몇몇 사람은 나의 진심어린 응원을 받는다. 나는 그 사람들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이다. 나는 나로서 그 사람들이 그들의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조할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예술적인 어떤 창조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창조를 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고, 돈이 안 되는 일이라서 그런 사람들은 늘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그래서 쉽사리 자존감이 떨어지는 동시에 자신만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창조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이상적이고 두리뭉실하고 현실에 맞지 않아보이며 미래지향적이다. 사실 가치는 원래 눈에 안 보이고, 측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교수님은 측정이 불가능하다고 하셨지만. 그것이 사서들이, 기록물전문요원들이, 활동가들이 힘든 이유가 되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하는 연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충분히 공공성이 높은 본질적 가치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사람들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그 어려운 활동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핵심가치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두리뭉실하고 듬성듬성 퍼져있는 드넓은 가치의 세계에서 우리가 핵심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찾아내는 것. 빠르게 바껴가는 사회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공평하게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찾아내고 그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내 연구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